본문 바로가기
성폭력

서울 초안산 고등학생 22명 '여중생 집단 성폭행 사건' 정리

제2의 밀양 여중생 집단 성폭행 사건으로 불리우는 사건입니다. 때는 바야흐로 2011년 9월 3일 서울특별시 노원구에 위치한 한 골목에서 여중생이던 B양과 C양은 캔맥주를 마시고 있었읍니다. 

술을 마시고 있던 B양과 C양을 지나가던 남자 고등학생 5명이 목격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은 여학생에게 '몰래 술을 마신 사실을 알려서 학교를 못 다니게 하겟다'고 협박하면서, 시키는대로 해라고 말한 후 여중생들의 휴대전화 번호를 적어갑니다. 

6일 뒤 당시 17세이던 K군에게서 전화가 걸려옵니다. K군은 '사람이 없는 곳에서 같이 술이나 한잔하자'면서 그 뒷말로 '안오면 학교에서 잘리게 해주겠다'고 협박을 해서 여중생들을 동네에 있는 '초안산'으로 불러냅니다. 

 

이곳은 도봉구 창동과 노원구 월계동에 걸쳐져 있는 야산명입니다. 2011년 9월 9일 밤 9시경 여중생들은 초안산에 올라 약속 장소를 찾아가게 됩니다. 여기에는 당시 보았던 5명을 포함해서 11명이 나와 있었습니다. 

그들은 여중생들이 만취할 때까지 계속 술을 먹이게 됩니다. B양과 C양이 정신을 놓게되자 4명이 번갈아가면서 B양을 집단 성폭행하게 됩니다. 나머지 7명중에서 일부는 성폭행을 시도하다가 B양이 반항을하자 미수에 그치거나 주위에서 망을 보면서 범행을 방조합니다. 

또다시 8일이 지나서 B양과 C양은 K군의 전화협박에 초안산으로 다시 불려갑니다. 이번에는 남자 고등학생 22명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지난번에 성폭행을 주도한 4명을 포함한 6명이 다시 B양과 C양을 번갈아서 성폭행합니다. 나머지 16며은 그것을 옆에서 지켜봅니다. 

 

그들의 수가 늘어난 이유는 무엇일까요?

자신들의 범행을 친구들에게 자랑삼아서 얘기하기 시작하면서, 추가로 성폭행에 가담할 사람들을 모으기 시작해서 공범들의 숫자가 늘어난 것입니다. B양과 C양이 이렇게 두차례에 걸쳐서 집단 성폭행을 당하게 됩니다.

가해자들의 대부분이 여중생들의 집 주위에 사는 이웃이었읍니다. 그러기에 충격과 후유증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스니다. 

신고를 하려고 해도 보복이 두려워서 경찰서에 도움을 청하지 못했습니다. 반면에 가해자들은 아무일 없었다는 듯 학교를 다니면서 일상으로 돌아갑니다. 

 

그렇게 B양과 C양만이 벙어리 냉가슴을 앓듯이 지내고 넘어가는 듯 했습니다. 

그러나 엉뚱한 곳에서 꼬리가 잡히게 됩니다. 2012년 8월에 서울시 도봉경찰서 46세의 김장수 경사는 다른 고등학생들의 집단 성폭행 사건을 수사하던 중이었읍니다. 

때마침 조사를 받던 피의자 가운데 17세이던 J군이 '저를 제외한 다른 피의자 3명은 1년전에도 다른 여중생들을 집단 성폭행햇어요'라고 털어놓게 되면서, 여중생들을 수소문해 직접 만나게 됩니다. 

김장수 경사는 가해자들을 처벌해야 한다며 여중생들에게 사건의 구체적인 내용을 털어놔 달라고 설득합니다. 그러나 피해 여중생들이 심각한 정신적인 후유증을 앓고 있어서 그때의 악몽을 떠올리려 하지 않았읍니다. 

결국에 여중생들에게서 피해사실을 듣는 것은 실패합니다. 피해 여중생중에 한명은 학업을 포기할 정도로 고통의 나날들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수사보다는 치료가 우선인 상황이었다고 합니다. 

해당 경찰서에서는 이 사건을 내사중지하게 됩니다. 김장수 경사는 가해자들을 기필코 법의 심판대 위에 세우겟다고 다짐합니다. 우선은 심각한 정신적인 후유증을 앓고 있던 피해자들을 치유하는게 급선무라고 판단합니다. 

그때부터 이들의 눈높에에서 대화를 시도합니다. 정신적인 안정을 취하고 피해 회복을 위해서 심리 상담센터를 소개해주게 됩니다. 김장수 경사는 그들의 부모와도 상담하는등 3년간 지속적으로 유대관계를 이어가게 됩니다. 

그러던중 김장수 경사는 경위로 승진하게 됩니다. 2014년 성북경찰서로 전출을 간 김장수 경위는 집단 성폭행사건을 직접 해결하고 싶다면서 2016년 2월 정기인사때 도봉경찰서로 자원해서 돌아오게 됩니다. 

사건을 맡을 수 잇을만한 여성청소년수사팀의 근무도 자원합니다. 김장수 경위의 노력에 피해자들의 마음의 문도 조금씩 열리기 시작합니다. 드디어 당시 피해상황에 대해서 입을 열게됩니다. 

수년간 담아두었던 악몽같은 피해사실을 털어놓게 됩니다. 3년 6개월여의 노력과 정성이 비로소 피해자들의 닫혀진 마음의 문을 열게 한 것입니다. 2016년 3월 경찰서에 고소장을 접수합니다. 

김장수 경위는 가해자들의 신상과 그들의 현 소재지를 파악하기 시작합니다. 사건 후 힘든 시간을 보내던 피해자들과는 다르게 가해자들은 정상적인 생활을하고 있었습니다. 성폭행을 했던 2명을 포함한 가해자 12명은 군복무 중이었읍니다. 

나머지 10명은 대학생이거나 직장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김장수 경위는 성폭행을 했던 4명을 불러서 차례로 조사합니다. 그들은 '5년이 지난 일이라 기억이 나지를 않는다','생사람 잡지말라며' 발뺌합니다. 

경찰은 가해자들의 혐의를 입증하기 위해서 광범위한 조사를 펼치게 됩니다. 그들을 서로 불리해서 조사하면서 퍼즐을 맞추듯이 범죄 사실을 맞춰가게 됩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의 진술이 엇갈리게 되고, 책임을 서로 떠밀게 되면서 가해자들은 체념하고 대부분의 범죄 사실을 인정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경찰에서 '그당시 그게 잘못인지는 알앗으나, 그렇게까지 큰 잘못인지는 몰랐다'고 말한것입니다. 잔혹한 성폭행ㅇ르 저즈르고도 자신이 한 것이 큰 잘못인지 알지 못했다고 합니다. 

경찰은 주범인 K군을 포함한 3명을 특수강간혐의로 구속합니다. 공범 6명은 특수강간 미수와 방조 혐으로 불구속 입건됩니다. 군복무중이던 피의자 12명은 조사를 마치고 각 소속부대 헌병대로 인계됩니다. 

5년만에야 드디어 피의자들 전원이 무더기로 재판에 넘겨지게 됩니다. 하지만 가해자들은 죄책감을 느끼거나 반성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가해자의 부모들도 자식들 못지 않게 뻔뻔했다고합니다. 

가해자의 한 어머니는 '어릴때 실수한거 가지고 경찰이 너무하네요. 출근은 할 수 있게 해줘야하는거 아닌가요?'라면서 경찰에서 따지게 됩니다. 이런 사실들이 언론을 통해서 알려지게 되면서 여론의 공분을 싸게 됩니다. 

그들은 재판에 넘겨졌고 피의자들 대부분은 솜방망이 처벌에 그치게 됩니다. 피의자들 중에서 최고형은 징역 7년, 나머지는 징역 2년 6개월에서 징역 6년에 그치게 됩니다. 5명은 증거부족을 이유로 무죄가 선고되기도 합니다. 

영원히 어둠속으로 묻힐 뻔한 사건을 해결한 한 경찰관의 끈질긴 집녑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사건해결의 일등공신인 김장수 경위는공로를 인정받아서 경감으로 1계급 특진했다고 합니다.


Please Enable JavaScript!
Mohon Aktifkan Javascript![ Enable JavaScript ]